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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 알아두면 쓸데있는 불교 공부

불법의 바다를 건너가는 노(楫)

  • 입력 2022.10.29

『화엄경』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불법대해(佛法大海)’라고 했다. 불법의 광대함을 드넓은 바다에 비유한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부처님께서 깨달은 진리가 깊고 넓어서 말과 생각이 미칠 수 없을 만큼 광대하기 때문일 것이고, 그와 같은 광대한 불법을 담아내기 위해 경전과 교리도 바다처럼 넓고 깊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믿음으로 들어가고 지혜로 건너는 바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렇게 깊고 광대하다면 어떻게 해야 불법의 바다에 들어갈 수 있고, 또 어떻게 해야 그 광대한 불법의 바다를 건너갈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대지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은 해답을 제시한다. 즉, “불법의 큰 바다는 믿음으로써 들어가고, 지혜로써 건너간다[佛法大海 信爲能入 智爲能度].”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불법의 바다로 들어가는 것과 건너가는 것을 구분해서 설명하는 대목이다.

 

첫째, 불법의 바다로 들어가는 것은 믿음이라고 했다. 어느 종교 할 것 없이 종교는 믿음이 근본이다. 믿음이 있어야 그 종교의 구성원이 될 수 있고, 그 종교의 가르침을 자기 삶의 지침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불법의 바다 역시 바른 믿음을 가져야만 들어갈 수 있다. 불법의 진리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있다면 누구나 불법의 바다로 들어갈 수 있다. 불자가 되어 법회에 참석하고 불교공동체 속에서 기도하고 수행하는 것이 믿음으로 들어가는 불법의 바다에 해당한다.

 

둘째, 불법의 바다를 건너가는 것은 지혜라고 했다. 불자에게는 불법의 바다에 들어가 그곳에 머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불자의 믿음을 완성하는 것은 마음으로 부처님과 같이 참된 진리를 체득하고, 몸으로는 스스로 깨친 그 진리대로 실천하고 부처님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불법이라는 인식[相]에도 걸리지 않고, 그 광대한 바다를 건너 가게 된다. 그 경지에 이르면 불법이라는 정해진 법에 구속되지 않으면서도 일체가 모두 불법[無法而無不法]이 되는 경지에 노닐게 된다.

 

문제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심심미묘법(甚深微妙法)’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그 심오한 지혜의 문을 여는가이다. 그 뜻이 깊고 깊으며, 그 이치가 신비롭고 미묘해서 중생들의 얕은 지식으로는 감히 알 수 없고, 유한한 말과 생각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말과 글로써 불법을 이해하고, 중생의 분별심으로 불법을 알았다고 여긴다. 알량한 지식으로 불법을 논하고, 현학적인 교리와 경전 구절을 읊으며 불교를 모두 알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개구리가 좁은 우물을 통해 보이는 풍경을 보고 세상을 다 알았다는 것과 같다. 이런 이유로 깊고 미묘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말에 있지도 않고, 경전과 같은 문자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말씀들이 설해졌다. 특히 깨달음의 체득을 중시하는 선종에서는 언어와 문자에 대한 경계가 유독 강조되었다.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不立文字]’라거나 선(禪)은 ‘경전 밖에 따로 전했다[敎外別傳]’ 등은 모두 말과 문자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무엇이든 지나치면 역효과가 나는 법이다. 말과 문자에 대한 경계가 지나치다 보면 조리 있는 말과 논리적인 생각도 무조건 알음알이라며 배격하게 된다. 심지어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긴 경전조차도 읽지 않고, 교리를 공부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는 “조리와 표현이 잘 갖추어진 법을 설하라.”라고 하셨던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드넓은 불법의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두 가지 장애

불법의 진리는 광대하기에 그 심오한 바다로 들어가는 문도 넓어서 ‘보문(普門)’이나 ‘광문(廣聞)’이라고 부른다. 원효스님은 그 문에 대해 ‘문이 아니나 문 아님도 없다[非門而無不門]’라고 했다. 불법의 바다는 말과 문자로만 들어갈 수 있는 그런 좁은 문이 아니라 그 무엇을 통해서라도 들어갈 수 있는 넓은 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넓디넓은 불법의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적다. 첫째는 말과 문자만이 불법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고집하는 것 때문이고, 둘째는 말과 문자 속에는 불법이 없다고 무조건 배격하는 것 때문이다.

 

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경전 구절과 문구만을 금지옥엽으로 여기며 교리의 옳고 그름만을 따지는 것에 매몰되어 도리어 불법의 근본 취지를 알지 못한다. 보라는 달은 보지 못하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기 때문에 불법의 참맛을 알지 못한다. 아무리 많은 경전을 읽고 교리에 박식해도 국자가 장맛을 모르듯 깊은 의미는 놓쳐버리고 문자와 교리에 도리어 속박되고 만다. 원효스님은 이런 부류를 ‘착유상자(着有相者)’라고 했다. 말과 글, 경전과 교리라는 상(相)에 매몰되어 경전에 담긴 본지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런저런 명칭과 이론을 따지면서 말과 글을 쫓아 끝없이 방황할 뿐[逐名而長流] 참다운 법에 안주(安住)하지 못한다.

 

선(禪)에서는 이와 같은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불립문자와 교외별전을 강조했다. 그런데 이것도 지나치면 또 다른 폐단을 낳게 된다. 무조건 말과 논리를 부정하고 경전의 가르침을 도외시하기 때문이다. 이런 극단에 빠진 사람들은 경전도 읽지 않고, 교리 공부도 하지 않는다. 무조건 말이 끊어지고, 사유가 끊어진 것만이 도(道)의 세계라고 생각하면서 무(無)를 숭상하고 모든 것을 공(空)이라고 강변한다.

 

원효스님은 이런 부류를 ‘체공무자(滯空無者)’라고 했다. ‘공에 걸려 무만을 외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말과 문자라면 무조건 부정하고 무엇이든 공이라 말하고, 경전과 교리에 대해서는 입도 벙끗하지 못하게 한다. 진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며 공을 숭상하므로 구체적이고 명료한 인식이 있을 수 없다. 이들은 장님처럼 추상적이고 모호한 인식에 가로막혀 ‘깜깜한 그 어떤 추상적 뜻[盲意]’만을 도라고 추종할 뿐이다. 나아가 불법에 대한 바른 안목을 확립해 주는 ‘경전과 교리[敎門]’를 등지고 ‘혼취에 빠져 깨어나지 못하고[惛醉而無醒]’ 방황할 뿐이다.

 

이에 원효스님은 불법으로 들어가는 문이 넓지만 들어가는 사람이 적은 이유에 대해 ‘있음에 집착과 없음에 막힘[着有滯無]’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지나치게 문자에 매달리며 말과 글에 집착하는 것도 불법으로 들어갈 수 없는 장애지만 반대로 무조건 말과 문자를 경계하면서 추상적인 인식과 공허 속에 방황하는 것도 불법의 문으로 들어갈 수 없는 장애라는 것이다.

 

 

지혜와 복덕의 노[楫]을 저어가자

불법의 드넓은 바다를 건너려면 이상과 같은 두 극단에서 벗어나 중도의 길로 가야 한다. 이에 원효스님은 “큰 바다에는 나루가 없으나 배를 띄워 노를 저으면 건너갈 수 있다[大海無津 汎舟楫而能渡].”고 했다. 불법은 넓은 바다와 같아서 나루터가 없다는 것은 문자나 경전만으로 건너갈 수 없음을 지적하는 것이고, 배를 만들어 노를 저어야 건너갈 수 있다는 것은 그 문자와 경전을 노로 삼아서 부지런히 저어야 한다는 중도의 가르침이다.

 

보통 위의 대목에서 큰 바다에는 나루가 없다는 ‘대해무진(大海無津)’만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것은 공을 추앙하는 무리처럼 ‘진리는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곳에 있고, 이해할 수 없으며, 말할 수 없다’라는 논리로 귀결되고 만다. 그런 생각으로 경전을 읽지 않으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 수 없고, 글과 경전을 읽지 않으니 합리적 사유도 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추상적이고 모호한 망상에 빠져 황당무계한 허구를 불교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원효스님은 진리는 대해무진이라고 말하고 끝내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면 진리를 신비화 시켜 범접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진짜 중요한 대목은 대해무진이 아니라 그 뒤에 이어진 구절이다. 태평양처럼 큰 진리의 바다에 나루터가 없다고 한탄만 하고 있지 말고 배를 만들고 노를 저어야 바다를 건너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대해무진을 통해 진리는 언어도단의 세계임을 일깨우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곳에 이르는 방법은 문자와 경전을 노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문자와 경전이 진리 자체는 아니지만, 진리의 세계로 다가가는 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금강경』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뗏목에 비유한 것[如筏喩者]’도 같은 맥락이다.

 

그렇다면 불법의 드넓은 바다를 건너갈 수 있는 그 노의 정체란 무엇일까? 그것은 경전을 읽고 그 속에 담긴 본지를 깨달아 바른 지혜를 내는 것이며, 깨침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경전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고자 하는 부단한 공부이다. 손에 박힌 가시를 뽑아내기 위해서는 또 다른 가시가 필요하듯 어리석은 생각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지혜의 말씀이 필요하고, 추상적인 혼취에서 벗어나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경전과 교리에 담겨있는 의미를 바로 이해하고, 자기화하는 수행이 필요하다.

 

 

그래서 원효스님은 “복과 지혜의 두 노를 갖추면(備架福智兩楫) 불법의 큰 바다를 능히 건너간다(能渡乎佛法大海).”라고 했다. 보살행과 같은 구체적 실천을 통해 복을 짓는 것과 부처님의 말씀을 공부하여 그 속에 담긴 바른 이치를 체득하는 것이 불법의 큰 바다를 건너가는 두 개의 노가 된다는 것이다. 지혜의 노는 경전에 담긴 뜻을 바로 이해하여 자기화하는 것이고, 복덕의 노는 부처님처럼 자비행을 실천하는 것이다. 결국은 바른 앎과 그 앎에 부합하는 실천이야말로 불법의 바다를 건너가는 두 개의 노라는 것이다. 부지런히 지혜와 복덕의 노를 저어 광대한 바다를 건너가는 것이 불자의 바른 길이다.

 

 

서재영 (성철사상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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