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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신도회 소식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 입력 2025.08.01

7월 13일(일), 대웅전에서는 법사이신 노전 정묵스님을 모시고 전각의례법회 법우님들과 함께 일요법회를 봉행하였다.

이날 스님께서는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라는 주제로 법문을 들려주셨다.

스님께서는 이 말이 곧 “공(空)의 이치와 같다”고 하시며 봉사자가 가져야 할 바른 마음가짐과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봉사를 하다 보면 서로의 마음이 상하는 일이 생기곤 한다. 이는 봉사의 본질인 ‘상대를 받들어 섬기는 실천행’을 잊고, 서로를 제대로 알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서로에게 벽을 세우지 않고 진심으로 마주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하셨다.

또한 스님께서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많은 일들을 타인의 탓으로 돌리거나 감정에 휘둘려 판단하게 되면 문제를 제대로 볼 수 없다고 하셨다. 오히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 바른 해결책이 보이고 참된 앎이 자란다는 가르침으로 법문을 마무리하셨다.

우리는 종종 절에 가서 “돈 많이 벌게 해주세요” “대학에 합격하게 해주세요”와 같은 소원을 빈다. 그러나 불교는 복을 비는 종교가 아니다. 참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이 목적이며, 그 깨달음 가운데 하나가 바로 ‘타타타(tathata-)’다.

 




‘타타타’는 산스크리트어로 ‘있는 그대로의 것’ 또는 ‘진실 그 자체’를 뜻하며, 불교에서는 ‘진여(眞如)’ 또는 ‘여여(如如)’라는 용어로 자주 쓰인다. 즉, 사물이나 세상을 왜곡 없이 바라보는 것이다.
가수 김국환의 대중가요 <타타타>는 작사가 양인자가 인도 여행 중 이 의미를 접하고 가사를 쓰게 되었으며, 남편 김희갑이 곡을 붙여 세상에 알려졌다.
이 노래의 한 구절인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는 이날 법문의 주제와도 맞닿아 있다.
우리는 타인의 마음을 정확히 알 수 있을까?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상대를 온전히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나조차도 나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오히려 오만일 수 있다.
너도 나를 모르고, 나도 너를 모른다는 ‘모름’을 인정할 때 비로소 진정한 이해가 시작된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자신의 경험과 기준에 맞추어 타인을 판단한다. 편견과 선입견이라는 마음의 색안경을 낀 채 상대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럴 때 오해와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연습’이다. 나의 마음을 돌아보고, 사물과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이야말로 삶의 지혜이며 수행의 길이다.
노래 가사처럼 “산다는 건 좋은 거지. 수지맞는 장사잖소.” 우리는 알몸으로 태어나 옷 한 벌뿐 아니라 넘칠 만큼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아간다. 그러니 욕심이 생기고 걱정이 밀려올 때마다 삶의 덤으로 여기며 여유를 갖는 것이 좋다. 걱정조차 없는 삶은 재미가 없다는 가사처럼 고락이 뒤섞인 인생이기에 더 의미 있고 아름답다.
또한 우리는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나 타인의 말 한마디에도 마음이 요동치곤 한다. 바람이 불면 바람을 받아들이고, 비가 오면 비에 젖으면 된다. 칭찬을 받으면 감사히 받고, 비난을 들으면 그것 역시 인연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모든 일은 인연 따라 일어나는 것이며, 그것을 왜곡하지 않고 바라볼 때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같은 비가 누군가에겐 슬픔이 되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기쁨이 된다. 삶 역시 어떤 이에게는 괴로움일 수 있으나, 다른 이에게는 즐거움이다.
세상을 여여(如如)하게,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면, 삶은 그만큼 더 우리에게 친절해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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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각의례법회 법회장 법성화 홍순분 (신도회 전각의례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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