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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 천년숲 사찰기행

태고의 신성한 숲을 여는 오동나무 속살 같은 오솔길

  • 입력 2023.05.26

햇살과 바람, 사찰이 일군 동리산 태안사 숲길 

 

태안사 능파각

수도권에서 멀리 떨어진 전라남도 곡성은 오지 중의 오지로 아주 깊은 두메산골이다. 태안사(泰安寺)는 그 곡성에서도 가장 깊숙한 골짜기인 죽곡면 원달리의 동리산(桐裏山)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태안사는 일찍이 통일신라 경덕왕 원년(742)에 ‘대안사(大安寺)’라는 이름으로 산문(山門)을 열었다. 이곳에 터를 잡고 절을 창건한 사람은 특이하게 ‘이름 모를 세 명의 신승(神僧)’이라고 전해온다. 대부분의 창건설화가 당대의 이름 높은 고승을 창건주로 등장시키는 것에 비하면 훨씬 사실적이어서 오히려 믿음이 간다.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문의 중심 선사찰로 자리 잡은 대안사가 태안사로 이름이 바뀐 건 서기 1702년(숙종 28) 이후로 보인다. 도심 불자들에게는 길이 험하고 산도 깊어 작정하고 나서야만 찾을 수 있는 절, 곡성 동리산 태안사를 향해 길을 떠났다. 

동리산 태안사 숲길

동리산 태안사 숲길


 절집보다 더 아름답다는 태안사 숲길과 계곡

태안사를 품은 동리산(753미터)은 그다지 높지는 않으나 계곡이 맑고 숲이 우거져 불자들과 일반인들 모두에게 사랑을 받아왔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는 ‘봉두산(鳳頭山)’으로 불리기 시작했는데, 이나저나 전설상의 길조인 봉황과는 인연이 깊은 산이다. 
‘동리(桐裏)’는 ‘오동나무 속’이란 뜻인데, 예부터 오동나무는 봉황이 깃드는 유일한 나무라고 신성하게 여겨왔다. 하여 ‘동리’라는 산 이름은 ‘오동나무 속처럼 (봉황이 깃들 만큼) 신성한 산’이란 뜻이 아닐까 싶다. 더불어 오동나무 속처럼 살기에 편안한 곳이라 해서 절 이름에 편안할 ‘安(안)’자를 썼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무심코 매표소를 지나는데, 매표소 문이 닫혀 있었다. 올해 5월 4일부터 새로운 문화재보호법이 시행되어, 전국 65개 사찰의 문화재 관람료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마음이 가벼워졌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어 국가지정문화재 보유 사찰에서 문화재 관람료를 받게 되면서 생겼던 등산객과 사찰 사이의 갈등이 다시는 없을 것이다. 다만 국가지정문화재에만 해당되므로, 지방 유형문화재 보유 사찰의 경우, 관람료를 받는 곳도 있다고 한다. 
‘桐裡山門(동리산문)’ 편액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아, 뭐가 좀 어색하다. ‘桐裡(동리)’의 ‘裡(리)’자가 일주문 편액의 ‘裏(리)’자와 달랐다. 생김새는 다르지만 발음과 뜻은 같은 글자임을 나중에 깨달았다.

산 들머리에서 태안사까지 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조태일시문학기념관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가거나, 태안사까지 태안사 주차장까지 차로 가면 된다. 당연히 태안사 숲길을 제대로 즐기려면 걸어가는 게 좋다. 아예 산 입구부터 걸으면 좋지만, 최소한 조태일시문학기념관부터 태안사 능파각까지 걸으면 약 2킬로미터의 천 년 숲길을 온전히 즐길 수 있다. 
태안사는 찻길도 포장을 하지 않아서 걷기에 호젓하다. 능파각까지 걷는 오솔길은 울창하고 아름다운 숲길과 시원한 계곡이 함께한다. 개울처럼 야트막한 계곡에는 활처럼 휜 멋진 나무다리도 있고 아기자기한 징검다리도 여러 번 나온다. 따가운 여름 햇살조차 맥을 못 출 만큼 고로쇠나무, 대나무, 떡갈나무, 단풍나무, 소나무 등이 울창하다. 그 숲길에서는 계곡 물소리와 바람 소리, 새소리가 벗이 된다. 그리고 다 걷고 나면 비로소 “태안사의 백미는 절집보다 아름다운 숲길과 계곡”이라는 사람들 말에 공감하게 된다.
한편, 찻길을 선택하면 네 개의 다리가 기다린다. 정심교(情心橋), 반야교(般若橋), 해탈교(解脫橋)를 차례로 지나면서 마음을 씻고 지혜를 얻어 해탈의 경지에 오르면, 마지막으로 능파각(凌波閣)에 앉아 태안사 숲길과 계곡의 비경에 취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마치 차안(此岸)을 건너 피안(彼岸)으로 가듯, 그런 마음가짐으로 청정한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라는 가르침 같은 길이다. 
 

반야교(般若橋)

미인의 가볍고 우아한 걸음걸이로

능파각은 태안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한국전쟁 때 일주문과 능파각만 불타지 않았다. 능파(凌波)는 ‘파도 위를 걷는 것 같다’라는 뜻으로, 미인의 가볍고 아름다운 걸음걸이를 이르는 말이다. 태안사의 금강문이기도 하고 다리이기도 하며, 누각이기도 하다.
850년 통일신라 때 적인 혜철(寂忍惠哲, 785~861) 선사가 지었고, 941년 고려 때 광자(廣慈, 864~945) 대사가 수리했다가 1767년에 다시 지었다. 전남 유형문화재 82호로, 다리 양쪽 침목에 걸터앉아 땀도 식히고 계곡 풍경도 감상할 수 있는 태안사의 명물이다. 
능파각을 건너 아름드리 소나무와 전나무 등이 울창한 길을 200미터쯤 올라가면 일주문이 나온다. 그 중간 100미터쯤에 오른쪽으로 성기암(聖祈庵) 가는 길이 있다. 성기암 길은 봉두산 등산길로 이어진다. 


태안사 삼층석탑(전남 문화재자료 170호)


광자대사탑비(보물 275호)


 동리산문을 연 혜철 선사와 3대조 광자 대사 

높은 돌계단 위 일주문에는 ‘桐裏山泰安寺(동리산 태안사)’ 현판이 걸려 있고, 안쪽에는 ‘鳳凰門(봉황문)’이라고 써 있다. 1683년(숙종 9) 각현 선사가 다시 짓고 1917년과 1980년에 보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민흘림기둥에 단순한 맞배지붕인데, 두 개의 기둥 양쪽에 앞뒤로 보조 기둥을 세웠다.
일주문 오른쪽 부도밭에는 보물 두 기가 서 있다. 태안사 중창조인 광자(廣慈) 대사 윤다 스님의 부도(보물 274호)와 부도비(보물 275호)가 생김새가 다른 몇 기의 부도들과 함께 햇살을 받고 있다. 공사 중 어수선한 주변 분위기에도 정교하고 기품 있는 조각 솜씨가 단숨에 눈길을 사로잡았다. 
일주문 왼쪽의 한 단 아래 연못에는 한가운데 섬을 만들어 삼층석탑(전남 문화재자료 170호)을 세워 놓았다. 고려 전기 양식의 이 탑은 본디 광자 대사 부도 앞에 있었다고 한다. 
대웅전에는 아미타여래를 본존으로,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협시로 모셨다. 삼존불 뒤쪽 벽에 동리산파 개산조 혜철 선사와 제3조 광자 대사의 진영이 나란히 걸려 있다. 
혜철 선사가 847년(문성왕 9) 이곳에서 산문을 열어 선각국사 도선(道詵, 827~898, 동리산파 제2조) 등 수백 명의 제자를 길러냄으로써 동리산파의 개산조가 되었다. 제3조 광자(廣慈) 윤다(允多) 스님은 태안사를 132칸의 당우를 갖춘 대사찰로 일구었다. 두 분의 부도와 부도비가 태안사에 있다는 것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태안사는 고려 초까지 송광사와 화엄사 등, 전라도 일대의 여러 사찰을 말사로 두었다. 고려 중기부터 상대적으로 사세가 기울어 지금은 제19교구본사 화엄사의 말사로 머물러 있다. 1280여 년의 긴 세월 동안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등 풍파를 겪는 중에도 태안사는 다섯 점의 보물과 세 점의 지방문화재를 지켜냄으로써 곡성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았다.
 

적인선사사리탑(보물 273호)


가장 높은 곳에 모신 혜철 선사의 조륜청정탑

태안사에는 부도밭이 두 개다. 일주문 옆 부도밭과 태안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적인선사사리탑(보물 273호, 조륜청정탑)’ 탑전이다. 곡성군에서는 얼마 전(2023. 3. 17) 이 탑을 국가지정문화재 국보로 승격시키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 부도탑의 예술적, 문화적 가치가 그만큼 뛰어나다. 전체 형태가 모두 8각형으로 통일신라시대 탑의 전형적인 모습이며, 3단의 기단(基壇) 위에 탑신(塔身)과 머리장식이 올려져 있다. 
861년 혜철 선사가 입적하자 나라에서 ‘寂忍(적인)’이라는 시호와 ‘照輪淸淨(조륜청정)’이라는 탑호를 내렸다. 통일신라시대 승탑 양식의 귀한 자료임은 물론 보존 상태도 훌륭하고, 조각 장식의 정교함과 미적 가치에서 어떤 것과 견줄 바가 없다. 탑전으로 들어가려면 배알문(拜謁門)을 지나야 하는데, 문 위쪽이 둥글게 파여 있는 모양새가 매우 특이하다. 탑전 오른쪽 담장 옆에 혼신을 다해 붉은 꽃을 피워내는 오래된 동백나무가 보는 마음을 더욱 경건하게 했다.
탑전 아래쪽에 묵직한 ‘선원’ 건물이 보인다. 태안사에는 이 선원과 더불어 원각선원, 명적암 등 비구 선원 세 곳이 있고, 봉서암 등 두 곳의 재가자 선원이 있다. 그리고 하안거와 동안거 사이 해제기간에도 봄가을 한 달씩 참선 행자들의 방부를 받는다. 
이는 선수좌로 살아온 주지 각초 스님의 원력과 의지의 결실이다. 재가자들의 참선수행을 적극 권장하는 각초 스님의 원력은 “도는 몸 밖에 있는 것이 아니요, 부처는 곧 마음에 있는 것이니, 오랫동안 익히면 찰나에 깨달음을 얻게 된다.”라는 적인 혜철 스님의 가르침에 닿아 있다. 각초 스님도 늘 “마음 밖에서 다른 것을 찾는 건 사이비다.”라고 불자들에게 강조한다. 

대바라 1쌍(보물 956호)


성기암

성기암 성공전


성인에게 공양 올리는 성기암 성공전

문화재 수장고인 보림각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대바라 1쌍(보물 956호)과 태안사동종(보물 1349호), 그리고 금고(북), 봉서암 극락전 아미타불상 등 귀중한 문화재들이 보관되어 있다. 태안사동종은 1465년에서 1475년 사이에 만들어졌으며, 명문에 따르면 1457년에 처음 만들었으나 파손되어 1581년 다시 만들었다. 대바라는 1447년 효령 대군의 발원으로 주조되었고, 1454년 개조되었다. 태안사가 조선 왕실의 지원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보림각에서 오른쪽 계곡을 건너면 재가선원인 봉서암이 나온다. 한글 창제과정을 영화화한 〈나랏말싸미〉의 천도재 촬영지인데, 공사 중이어서 들어가지 못했다. 이 영화는 한글 창제에 신미 스님 등 불교계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조목조목 밝혀놓았다.  
내친걸음에 성기암(聖祈庵)까지 올랐다. 봉서암에서 등산길을 따라 10여 분 올라가면 기도처로 유명한 성기암이 나온다. 성인에게 기도하는 기도처, 또는 기도로 성인을 낳은 곳 등,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한다. 이 암자에서 기도해서 고려 개국공신 장절공 신숭겸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신숭겸은 전쟁 중에 적에 쫓기는 태조 왕건과 옷을 바꿔 입고 대신 죽음을 당했다. 태안사 아랫마을 생가터에 그의 충절을 기리는 영정비각과 유적지가 있다.
성공전(聖供殿)은 성기암의 칠성각이다. 붉디붉은 영산홍 꽃무리에 둘러싸인 두 개의 검은 바위와 그 사이로 난 좁은 돌계단 풍경이 호젓하고도 눈부시다. 성공전 법당 벽의 칠성각 중수 동참자 명단이 적힌 목판에서 세월의 두께가 읽힌다. 호암미술관 소장품 중에 1739년 제작된 ‘태안사 성기암 칠성탱’이 있다는 글을 본바 있어 감회가 남달랐다.  

태안사 숲길 산책은 조태일시문학기념관 관람으로 마무리하면 금상첨화다. 태안사 스님의 아들로 태어나 태안사 숲에서 유년기를 보낸 민족시인 조태일의 시 작품과 삶의 모습, 활동 기록 등이 전시되어 있다. 

조태일시문학기념관




 

노희순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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